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웹툰·애니·게임·기타

트레이스 이야기

2019년에 쓴 글 뜯어고쳐서 올려봄. 1부 완결(라스트 에피소드)까지만 보고 쓴 내용.

 

 


1. 그 시절

  내가 트레이스를 처음 봤던 건 벌써 10년도 더 전임. 지인 추천으로 보기 시작했는데 그 시기가 마지막날 에피소드 마무리되기 직전이었다. 트레이스의 첫 에피소드인 '보이지 않는 것' 에피소드는 내가 처음 트레이스를 보기 시작한 시점에도 이미 유행은 지난 이야기였다. 당시에도 '저 교복스타일은 유행 지난 거 아냐?' 싶었으니.

  이처럼 트레이스의 초반부에는 당시에도 살짝 유행이 지났고 지금 시점에선 이미 죽어버렸지만 어쨌든 한 시대를 강하게 풍미했던 코드가 가득 담겨있다. 나는 유난히 감정없는 킬러 모리노아 진과 엉뚱한 구석이 있는 장미의 연애를 다룬 '장미' 에피소드에 항상 평가가 박한 편이었는데, 그건 당시의 내가 커버하기에도 올드했던 갬성 때문이다. 나중에 찌질의 역사라는 웹툰의 설하라는 캐릭터를 보고 '아 그게 그 시절 감성의 일부구나'라고 깨달았으니.

(잠깐 첨언하자면 '사차원 캐릭터'는 서브컬쳐계에서 늘 수요가 있어왔다. 다만 예측하기 어려운 엉뚱한 성격이나 통통 튀는 매력을 남자 쪽에서 신선한 충격으로 받아들이고 때로는 그걸 신비롭게 여기는 남자 쪽 태도야말로 그 시절 갬성의 핵심이 아닐까 생각합니다. 장미가 장미를 먹어서 그 시절 캐릭터라기보단 그런 장미를 대하는 진의 태도가 더해졌을 때 그 시절 향취가 살아나는 거겠죠.)

  정의로운 일진짱 한태은과 보호받는 연약한(?) 남캐 사강권의 에피소드도 내 세대 이야기는 아니다. 샤기컷 유행은 슬슬 지고 있었고 그 어떤 애들도 그 길이의 교복치마를 입진 않았다. 우리 학교 일진은 옆 학교 일진이랑 쌈박질을 하는 대신 후배들한테 사소한 걸로 기합줬다가 강제전학 당했다. 근데 '보이지 않는 것' 에피소드에서는 박해받는 고독한 힘숨찐 사강권이 홀로 분투하는데 그건 현재까지도 먹히는 코드인데다 오타쿠들이 유독 환장하는 내용이라 나도 꽤나 재밌게 봤다. 지금도 탈덕 못해서 재밌게 봄.

  트레이스의 첫 스타트를 끊는 에피소드는 그 때나 지금이나 조금 오그라드는 구석이 있다. 그걸 어느 정도 커버해주는 것이 연출과 주제의식이다. 트레이스의 메인 테마는 '사랑'이고 이야기의 시작부터 끝까지 사랑 타령으로 가득하지만 이상하게도 '보이지 않는 것'에서는 유독 소수자로서의 트레이스의 처지가 부각되는 편이다. 그 때나 지금이나 내가 태은이랑 강권이의 심리를 따라가기는 버거운 구석이 있다. 하지만 이해받지 못하는 소수자로서 살아가기 위한 강권이의 모습만은 늘 인상깊게 남아있다. 작품이 진행될 수록 다들 거대 음모에 대항하는 정의의 용사들이 돼가서 이런 부분은 찾아보기 힘들게 됐지만.


2. '거지' 에피소드까지는 보세요.

  반면 '거지' 에피소드는 지금 봐도 그렇게 올드하지 않다. 가족애라는 코드는 인류가 멸망할 때까지 우려먹고 또 우려먹을 코드고 에피소드의 메인 빌런 또한 과거부터 지금까지 꾸준히 잘 우려먹는 타입이다. 큰 줄기는 어디선가 본 내용이지만 한국 신파 영화 주인공이여야 할 김윤성이 초능력 히어로물에 들어오면서 색다른 재미가 생기게 됐다. 거지 에피소드에는 지금까지도 유효한 인기요소가 많기 때문에 '보이지 않는 것'이 취향에 맞지 않더라도 거지 에피소드까진 봐달라고 사람들은 광광되는 것일지도 모른다.

  개인적으로는 코리안 팝콘 무비에서는 발이 치일 만큼 흔한 캐릭터가 슈퍼히어로물에서 재해석되면서 어디서도 보기 힘든 독자적인 캐릭터성을 갖게 된 것이 상당히 인상깊다. 분명 거지편의 거지아찌는 쇠약해보이는 팔자주름 빼고는 어디서 많이 본 것 같았는데 라스트 에피소드의 김윤성은 상당히 독특한 캐릭터가 되어 있다. KTX 타고 가면서 봐도 더이상 성장의 여지가 없어보였던 완성형 캐릭터였는데 캐릭터의 입체성을 확장하며 점점 세부적인 틀이 잡혀가며 캐릭터가 더욱 풍부해졌다. 김윤성을 관통하는 코드는 그 때나 지금이나 여전히 사랑과 희생뿐인데, 걸어온 궤적이 워낙 독특해서 유니크해진 굉장히 특이한 캐릭터가 김윤성이다.

  캐릭터 구축에 성공한 진주인공 김윤성과 달리 다른 캐릭터들은 이야기가 진행되면서 개성을 잃어만 갔다. 진은 츤이라는 것을 기억하는지 모르겠고 강권이는 과묵한 쿨찐미를 잃어버렸다. 덕분에 모든 캐릭터의 성격이 약간 그게 그거가 되는 기분이지만 이야기의 대들보인 김윤성이 아직 튼튼한데다 개성 강한 신캐들이 계속 투입돼서 크게 눈에 띄지는 않는다.


3. 덤필런이라는 장애물을 견디세요.

  마지막날 에피소드는 연재 당시에는 연재 속도 때문에 독자들을 실시간으로 괴롭게 했던 이야기지만 통으로 보면 떡밥이 드디어 풀리기 시작해서 꽤나 재미있는 에피소드다. '교류자'는 고영훈 작가 특유의 색채가 워낙 강해 호불로가 갈릴 수 있고 '아머라인'은 서범기의 발암력 때문에 답답할 수 있으나 에피소드가 완결난 시점에서 돌아볼 때 여전히 재미있는 '트레이스'였다. 근데 덤필런이 나오는 에피소드는...음....나도 보기 힘들어서 중간에 보다말고 최근까지 트레이스 잊고 지냈음.

  덤필런 에피소드는 갑자기 이상해진 연출과 마지막날 에피소드에서 지겹게 봤던 반복적인 패턴의 재탕이라는 악재가 겹친 결과물에 가깝다고 생각한다. 개인적으로는 나중에 다시 한꺼번에 보니 애정과 관성으로 볼만하다는 느낌인데, 이 시리즈가 그 후에도 계속 그랬으면 그냥 '트레이스는 마지막 날로 끝인 이야기입니다. 자체 완결하세요.'라고 말했을 것이다. 다행히도 그 후에 김수혁 에피소드(일상)로 폼을 점점 회복하더니 더블랙 에피소드부턴 세계관 떡밥을 드디어 대량으로 풀면서 새로운 재미를 주고 있다. 덤필런 때문에 떨어져나간 독자들이어 다시 트레이스로 돌아오라!!! 우리에겐 더블랙이라는 가나안이 있다!!!!!!


4. 변화

  다음 웹툰이 아직 건재하던 00년대. 다음 웹툰에는 유독 만화나 인터넷 문화보단 한국 영화산업과 드라마 산업의 영향을 강하게 받은 작품이 많았다. 그 한국갬성 짙은 작품 중 하나가 트레이스다.

  트레이스는 한국 신파계 영화의 장점과 단점을 모두 가지고 있다. 감정에 호소하는 장면의 파괴력과 그로 인한 과잉 감정. 사랑에 대한 집착은 있지만 그 근원에 대한 성찰이 없는 예찬(덕분에 이 만화의 연애라인은 장미 에피소드 이후 죄다 그게 그거다). 학원폭력, 정부에 대항하는 정의의 군단, 가족을 위한 희생 등 한국 영화가 사골 우리듯이 써먹었던 소재. 여기에 차별화되는 요소는 이능력 요소와 트러블이라는 만화적인 요소 정도였다. 트레이스에 대한 애정과는 별개로 마지막날 에피소드까지 난 이 견해를 고수했으며, 교류자 에피소드는 그저 만화 '술'에서 보여줬던 작가 특유의 색채가 강하게 드러나는 에피소드 정도로 치부했다.

  변화는 더블랙에서 있었다. 10년동안 한국 대중문화는 좋게 말하면 담백해졌고 나쁘게 얘기하면 이전에 비해 조금 드라이해진 경향이 있다. 담백한 작품들이 점점 더 인기를 끌게 되었다. 과잉감정으로 대표되는 작품은 여전히 자리를 잡고 있지만 전 세대를 아우르는 메인스트림이라 보기는 조금 어렵게 되었다. 그리고 더블랙 에피소드도 무슨 이유에서인지는 모르겠지만 조금 담백해졌다. 트레이스 특유의 신파는 솔직히 여전한데, 그게 그래도 많이 줄었고 그 자리를 차지한 게 세계관에 대한 설명이다.

  이 만화는 거의 10년 동안 떡밥을 존나게 살포했기 때문에 회상으로 대표되는 설명충적 세계관 및 뒷배경 설명이 나를 비롯한 갈증에 시달리던 독자층에게 의외로 잘 먹혀들었다. 마침 이상한 컷배분이 사라지고 다시 원래의 널찍널찍하고 시원한 연출이 돌아왔으며 공개된 세계관은 (미묘한 부분이 있지만) 튼튼하고 단단한 데다 신선했다. 판타지 세계관은 까닥 잘못하다간 너무 오타쿠스러워지는 위험요소가 있는데, 치트키라고도 할 수 있는 신화적 요소가 버무려져있고 어차피 독자들은 죄다 10년 넘게 조련당해서 그런 것쯤은 견딜 수 있게 됐으니 괜찮다....

  특히 트레이스의 세계관은 환상적인 분위기를 자아내는 요소로써 그치지 않고 사랑이라는 메인 테마와 매우 잘 어우러져 있다. 이게 진짜 중요한데 이게 안되면 그냥 망한 이세계물처럼 되기 때문이다ㅋㅋㅋㅋ 거기에 각종 설정이 단순한 설정놀음에 그치지 않고 이야기의 중요한 전개에 죄다 활용된다는 점에서 이 만화는 진짜 모범적인 판타지 만화다.

  이 긍정적 변화는 라스트 에피소드에서 후반부에서 다시 살짝 퇴색되지만 그건 초장편 떡밥 마무리짓는 큰 에피소드라 어쩔 수 없음.


5. 웹툰?

  지금은 세상 사람들이 다음 만화속세상보단 카카오페이지를 많이 보는 시대가 왔지만 다음 웹툰은 웹툰의 큰 기틀을 만드는 데 큰 역할을 했다. 웹툰 시장이 안정적으로 자리잡기 전까지 충성도 높은 팬들이 꽤나 큰 역할을 했는데, 그 팬들을 붙잡고 만족시키는 작품들은 네이버보단 다음에 있었다. 트레이스도 그런 웹툰이다.
(여담인데 그 팬들은 다음 만화속세상이 무너져서 떠나고, 15년에 웹툰판이 메갈리아와 페미니즘과 깊게 얽혀버리면서 또 떠나면서 거의 남아있지 않을 것이다. 그들이 남아있다 해도 그 전에 보여주었던 충성도와 애정은 조직력을 잃어버려서 개개인이 아직 간직하고 있더라도 인터넷에서는 더이상 확인할 수 없다. 최근에 유입되는 어린 웹툰팬들은 내가 나이 먹고 요즘 웹툰을 잘 안봐서 모르겠음.)

  과몰입한 팬의 주장일 수도 있으나 어쨌든 개인적으로 트레이스는 00년대 한국 웹툰에서 큰 자리를 차지하는 웹툰이라고 본다. 단지 뷰수가 높아서 중요했다기보단, 그 시절 웹툰이 어떤 사람들을 타깃으로 어떤 취향의 이야기를 하고자 했는지 보여줬다는 점에서. 그리고 웹툰이 초기에 어떤 것들을 자양분으로 성장했는지 가장 적나라라게 보여준다. 영화와 단막극 드라마, PC통신 시절 판타지 소설, 점점 잊혀져가던 출판만화 등. 돌파구를 찾고자 세계관 확장 등 다양한 시도가 이루어졌다. 긴 연재 기간 동안 새로운 시도 그리고 매체의 변화에 따라 횡스크롤 형식 웹툰 연출이 변화해가는 모습 또한 확인 가능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