엘데 섬의 레니에, 이난나의 사랑을 받은 자여.
그대는 숱한 사내들을 홀릴 향기를 갖고 있구나.
너를 사랑하는 두 명의 사내가 보인다.
네가 사랑하는 두 명의 사내가 보인다.
축복은 저주가 되었고, 선택은 족쇄가 되었다.
레니에는 더 이상 그것에 휘둘리지 않기로 했다.
특히,
누군가를 사랑해 그 저주까지 옮기는 짓은 절대 하지 않겠다고 다짐했다.
사실 역사시대 이전을 배경으로 하는 글을 그다지 좋아하진 않는데...
이 책 너무 예전에 사뒀다. 구매할 당시엔 그런 호불호조차 없었고.
그리고 어차피 연작인 실버트리 읽고 싶어져서 사긴 했을 거임.
황금숲 못 읽어서 실버트리 1권만 읽은 적독 됐거든요.
글이 신화적이다. 등장인물들의 성격이 신화적이진 않은데 어쨌든 신화적인 글이라 강간, 식인, 난교 등이 나오기는 함.
그래서 읽는 내내 '자르라'고 외치지 않을 수 없었음... 불특정다수를 향해 이런 저주를 하는 경험은 또 처음이네요.
자르라고 계속 궁시렁대다 진짜 잘린 사람 나와서 당황하긴 했는데
알고보니 진짜 잘라야 되는 놈이라 그 후로도 계속 자르라고 외쳤음.^^
다시 신화 이야기로 들어와서, 글의 큰 구조 또한 신화와 유사하다.
주인공 레니에에게 신탁이 내려지고, 레니에는 운명에서 벗어나기 위해 발버둥치지만 결국 신의 말에서 벗어날 수 없는 이야기.
레니에는 신탁대로 쿤과 기치다라는 남자들을 만나 사랑하게 됨.
쿤은 생긴 건 영 별로임. 이야기의 거의 말미까지 그 사실이 강조되는데,
인종이 달라서 못생겨보이는 거라고 곡해하던 한 독자를 결국에는 좌절시킬 수준이었음.
성격도 전통적으로 좋은 신랑감으로 간주되는 스타일이며, 본인에게 지워진 의무보다 늘 레니에를 최우선으로 둠.
기치다는 쿤과 완전히 대조적인 인물임. 누구나 눈이 돌아갈만큼 미인이고 레니에와 본인의 의무 사이에서 갈등하다 늘 후자를 택하는 인물임.
그리고 레니에를 곁에 두기 위해서라면 레니에에게 상처를 주는 선택도 함.
현실에서 진짜 결혼 상대를 고르는 일이라면 모를까, 독자 만족을 목표로 하는 장르물에서 쿤 같은 애들은 얼굴부터 기치다 같은 애들한테 상대도 안 된다.
그래서 이 이야기는 시점을 비틀어 쿤과 레니에의 사랑 이야기부터 시작함. 안 그러면 승부가 안 되므로...
제가 갈등구조를 만들기 위해 로판남주들이 제정신이 아니거나 인성 터지는 상황을 이해하는 것과는 별개로 걔들을 그다지 좋아하지는 않거든요?
그런데도 쿤을 볼 때마다 어?어??어???했음.
현대 여성이 '결혼'을 목표로 할 때 기치다보다는 쿤 같은 면모가 어느 정도 있는 남자를 고려하게 될텐데
(그의 순애력 말고 무던하고 우직한 성격 쪽을 이야기하는 겁니다)
로판 보다가 현실로 인양되는 느낌을 좀 받았음ㅋㅋㅋ...
사실 기치다가 없었으면 쿤 그냥 얼굴만 로판남주답지 않은 좋은 로판남주였을 텐데
레니에의 인생 선택지에 기치다가 존재하는 바람에 갑자기 음... 이렇게 되는 거죠.
이하 스포주의
뭐 그렇다고 레니에가 기치다를 선택할 수 있었냐? 그건 아님.
기치다는 주어진 역할과 의무에서 벗어날 수 없는 사람이거든요.
반면 레니에는 주어진 운명을 거부하고 그 사이에서 자신의 길을 만들고자 끊임없이 노력합니다.
레니에는 내가 그동안 본 로판 여주들 중에서 손에 꼽을 수 있을 정도로 지독한 친구임.
수많은 신화의 주인공들이 좌절하고 순응할 시점에서도 포기하지 않는 레니에야말로 불굴의 의지의 소유자다.
레니에는 본인이 원하는 삶을 포기할 때는 사랑하는 이의 (광의적) 생존이 걸렸을 때만임.
이 굳센 의지 덕에 레니에는 본인이 원하는 삶에 가까이 다가갈 수 있었던 것임.
《황금숲》은 이런 인간의 의지와 삶에 대한 갈망에 대한 찬가가 아니었나 싶음.
신의 뜻을 증명하기 위한 수단이 아닌, 인간의 운명을 개척하는 자유의지에 대한 예찬이 인간 찬가가 아니면 뭐겠습니까.
근데 원래 자유는 얻는 것도 영위하는 것도 좀 힘든 면이 없지 않다고 생각하거든요.
그래서 레니에의 삶도 초반에 얘기했듯 매우 하드코어함.
저는 읽다가 저를 보호하기 위해 생각을 좀 그만뒀고요,
전쟁씬에선 '음... 신입이 아무리 스펙이 좋더라도 초반에는 그래도 경력직이 낫지...' 이딴 생각이나 하면서 읽었습니다.
(너무 재밌어서 책을 손에서 놓진 못함)
그래서 기치다와 쿤을 보고 '카타는 식인수리의 후손으로 환생하고 식인수리는 카타의 후손으로 환생한 것 같아 묘하네,' 까지만 생각했지
검은 용까지는 아예 생각을 못함. 다시 읽으면 기치다의 행적을 보고 좀 느끼는 바가 달라질 것 같다.
그리고 닌기쉬지다의 이름이 앞에 나왔는지 안 나왔는지 모르겠는데
어쨌든 저쨌든 수메르신화 알못인 나는 검은 용만 알아서 ... 레니에와 닌기쉬지다의 대화를 100% 즐기지 못해서 아쉬웠음.
이런저런 이유로 재독하면 느낌이 많이 달라질 것 같은 책이다.
그리고 그 재독이 매우 기껍게 느껴지는 책이기도 하다.
여담인데 제가 최애에게 이슈타르가 빙의했음에도 FGO는 안해서 메소포타미아 신화는 잘 모르거든요?

근데 이슈타르가 이난나였군요....
아... 오타쿠 생활 더 영위하려면 좀 알아두긴 알아야할 듯.
'웹소설(로맨스)' 카테고리의 다른 글
| 25년 하반기~26년 상반기 로맨스 판타지 소설 결산 (0) | 2026.07.08 |
|---|---|
| [웹소설/로맨스판타지] 《애 딸린 하녀》 리뷰 (0) | 2026.07.04 |
| [웹소설/로맨스판타지] 《남주들의 집착보다 내 탈영이 빠르겠다》 리뷰 (0) | 2026.07.02 |
| [웹소설/로맨스판타지] 《빙의자가 다녀간 후》 리뷰 (0) | 2026.07.02 |
| [웹소설/로맨스판타지] 《그림자 없는 밤》 리뷰 (0) | 2026.06.21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