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출판만화

[만화 리뷰] 무늬뿐인 영애는 왕태자 전하의 고용된 약혼자

 

학생과 백수 시절, 내가 만화에 기대하는 것은 완성도 있는 작품성이었다.

난 우울한 컨텐츠도 피폐한 컨텐츠도 잘 봤고, 작품의 분위기가 어떻든 결말이 어떻든 작품성에 기여하는 요소라면 다 받아들일 준비가 되어있던 독자였다.

근데 이게... 사람이 취직을 하니까 옛날에는 찾지도 않던 작품을 찾아다니게 되더라.

인위적으로 기분을 붕 띄워주는 동시에 현실 생각이 잘 나지 않아 크게 스트레스를 주지 않는 작품은 K-직장인의 필수품이었음...

그렇게 힐링물 왜 보는지 모르겠다던 새끼 오타쿠는 자라서 힐링물을 비축해두는 늙은 오타쿠가 되고 만 것입니다.

 

'무늬뿐인 영애는 왕태자 전하의 고용된 약혼자'가 잘 만든 작품이냐고 물으시면... 바로 긍정하기는 조금 어렵다.

하지만 이건 삶에 찌든 직장인이 기분 좋고 스트레스 받지 않으면서 처음부터 끝까지 즐겁게 달릴 수 있는 작품으로,

작품이 가진 본연의 목적에 아주 충실한 만화다. 그리고 생각보다 그런 게 많지 않다.

 

줄거리... 옛날 인터넷 유행어로 요약하면 '제곧내'다. ..

어제 부장님 페이스 맞춘다고 술 궤짝으로 먹어서 어질어질하니까 그냥 출판사에서 올려준 작품 소개를 아주 조금 고쳐서 가져와 보여드림.

 


예법을 배우고자 왕궁에 들어갔지만 어느새 허드렛일을 하는 신세가 된 가난한 백작 영애 리네트.
오늘 아침도 평소처럼 청소를 하고 있는데, 여자의 접근을 허락하지 않기로 유명한 왕태자가 지나가던 길에 서류를 떨어뜨렸고,

그 서류를 전해주려고 했던 것뿐인데 엄청난 일에 휘말리게 되고 말았다?
전하에게 다가가는 여자는 죄다 쓰러지다니, 도대체 어떻게 된 일이지?! 게다가 만져도 괜찮은 것뿐인데 그것만으로 약혼자로 고용되다니 진짜야?!
사연 있는 왕족과 가난한 영애의 계약 로맨스♡


 

네, 제목 그대로의 내용입니다. 그리고 TL 좀 봤다면 대충 스토리가 어떻게 전개될지 예상이 될 텐데, 거의 그대로 간다고 보면 된다.

익숙한 클리셰대로 쓰는 작품이고, 심지어 다 아는 얘기임에도 그걸 그렇게 치밀하게 전개하지도 않는다.

위기를 너무 대충 헤쳐나가서 절정의 카타르시스가 약간 부족하다고 느껴질 정돈데,

작품에 전율 느낄 체력조차 없는 직장인 독자를 타깃층으로 잡았다면 그것이 오히려 현명한 선택일지도 모르겠다.

뭐 아무튼 만화 읽는데 뇌를 전혀 쓰지 않아도 돼서 편했음. 회식 후 숙취에 꼴아있어도 술술 읽히는...

 

그리고 이 만화가 내게 좀 더 와닿았던 이유는 왕자가 대놓고 상냥한 댕댕이 캐릭터였기 때문이다.

내가 TL은 잘 안 봐서 모르겠는데, 어쨌든 일본산 헤테로 컨텐츠에서 사회성이 박살나지 않은 상냥한 남캐를 데리고 재밌게 만든 작품은..귀한 물건입니다.

댕댕이랑 (땅굴은 조금 덜 팠다면 좋았겠지만) 어쨌든 씩씩하고 귀여운 영애님의 합이 좋았던 만화. 둘 다 햇살계열이라 구마되는 느낌이었다.

표지에서 둘 다 머리가 시뻘건데는 다 이유가 있었다니까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