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7년에 쓴 글. 2021년에도 유효한 이야기인지는 잘 모르겠음...
웹툰 시장에서 소년만화의 수요는 항상 컸지만 공급은 오랜 기간 동안 성인층을 대상으로 하는 만화에 비해 적었던 걸로 기억합니다. 다음 웹툰은 기존 이용자층이 원래 연령층이 높은 편이었기 때문에 성인향 액션 만화와 드라마 장르에 집중해왔고, 네이버 웹툰도 극초창기에는 신문의 만화 서비스를 벤치마킹했기 때문에 성인 대상의 만화 공급에 치중해왔습니다. 당시 인기작을 보면 전연령층, 혹은 성인 독자를 대상으로 한 만화가 대다숩니다. 웹툰이라는 매체의 특성상 학생들을 타깃으로 하는 만화와 성인 독자들을 타깃으로 하는 만화를 명확히 구분하기가 힘들지만, 어쨌든 학생들 사이에서 화제가 된 웹툰은 항상 있어왔기 때문에 네이버 웹툰을 위주로 청소년층 사이에서 큰 인기를 끈 웹툰에 대한 썰을 풀어볼까 합니다.
웹툰 중에서 가장 먼저 10대 사이에서 인기를 끈 만화는 '입시명문사립 정글고등학교'(이하 정글고)입니다. 2006년부터 연재가 시작된 이 만화는 입시위주 교육에만 매달리는 한국 고등학교의 현실을 유머와 함께 풀어낸 만화로, 당시 중고등학생들로부터 많은 공감을 얻었습니다. 학생들의 블로그 포스팅에 웹툰에 등장한 캐릭터 '만년삼'과 웹툰 내에서 나온 부적이 함께 올라갔고, 만년삼 인형이 상품화 되어 팔리기까지 했습니다. 이 과정에서 정글고라는 웹툰이 알려졌고, 웹툰을 보는 학생 독자 수가 점점 증가하게 됐습니다.
김규삼 작가의 정글고는 출판만화의 감성을 2000년대 중후반 독자들이 공감할 수 있도록 잘 가공해 웹툰이라는 시장에 내놓은 작품입니다. 2000년대 중반 당시 웹툰에서 중요했던 코드는 웹툰의 극초기 형태였던 생활툰으로부터 이어져 내려오는 '공감' 코드였습니다. 정글고 말고도 다른 청소년들에게 인기있었던 만화도 어느 정도 청소년이 공감하기 좋은 소재를 다루고 있었습니다. 편의점 이야기를 다룬 '와라! 편의점'(2008~2014), 일상에서 공감할 만한 이야기를 그리던 초창기 '마음의 소리'(2006~), '놓지마 정신줄'(2009~) 등이 그 예라 할 수 있습니다.
하지만 시간이 지날 수록 생활툰으로부터 내려온 공감 코드는 시들해집니다. 그 자리를 대신하게 된 건 디시인사이드 등의 웹 커뮤니티에서 파생된 '병맛' 코드입니다. '병맛'은 '병신같은 맛'이라는 말의 준말로 '실제로 병신같지만 웃긴 것들'을 지칭하는 말입니다. 병맛 만화는 범위를 넓게 잡는다면 수많은 개그 만화까지 포괄할 수 있는 말이지만, 보통은 개연성이 떨어지는 전개와 함께 생뚱맞은 결론을 내는 만화를 지칭합니다. 웹툰은 매체 특성상 웹 문화에 영향을 많이 받을 수 밖에 없었고 웹 커뮤니티의 유행이었던 병맛 코드도 적극적으로 수용했습니다. 이와 함께 웹 게시판에서 활동중이었던 작가들도 여럿 데뷔를 하게 됩니다.
병맛 만화 그 자체는 장르 특성상 금방 시들해졌습니다. 대신 병맛 코드는 기성 웹툰 작가들이 병맛 코드를 잔뜩 수용한 만화를 연재함으로써 웹툰계에 한층 더 스며들게 됩니다. 또한 새로 데뷔하는 신인 작가들이 병맛 코드를 나름대로 수용함에 따라 웹툰은 독특한 스낵컬쳐로서의 색채를 띄어 나가게 됩니다. 느슨한 개연성을 개그에 이용하지만 동시에 화려한 그림과 나름의 서사를 제시함으로써 원류 병맛 만화와는 다른 병맛 만화들이 탄생합니다. 그리고 기존 병맛 만화가 커뮤니티를 비롯한 인터넷 헤비 유저들의 지지를 받았던 반면 기성 작가들의 병맛 만화는 좀 더 넓은 청소년 계층을 사로잡습니다. 이런 만화의 대표작으로는 '목욕의 신'(2011~2012), '웃지않는 개그반'(2012~), '용의 아들 최창식'(2011~2013)의 초반부 등이 있습니다.
한편 가볍게 웃을 수 있는 이야기에 대한 수요도 늘 있어왔지만 독자를 대리 만족 시켜줄 멋진 이야기에 대한 수요도 항상 존재해왔습니다. 네이버 웹툰이 막 사업을 팽창시킬 무렵, '노블레스(2007~)'라는 웹툰이 연재됩니다. 노블레스의 스토리 작가인 손제호 작가는 원래 판타지 소설을 연재하던 작가입니다. 때문에 노블레스에는 기존 한국 판타지 소설에서 흔히 볼 수 있었던 플롯과 정서가 짙게 깔려있습니다. 이미 소설 쪽에서는 익숙해질대로 익숙한 내용었이지만 흔하지만 많은 사람들이 좋아하는 대중적인 이야기가 이광수 작가의 수려한 작화와 함께 웹툰에 이식되면서 노블레스는 폭발적인 인기를 끕니다. 하지만 노블레스의 성공이 웹툰 시장에 경향 자체에는 크게 영향을 주지 않는 듯 했습니다. (일부 판타지 소설 작가들이 손제호 작가를 따라 웹툰 업계에 뛰어들긴 했지만 큰 성과를 보지는 못합니다.)
병맛 만화가 점점 세를 늘리던 와중, 네이버 웹툰에선 '폭풍의 전학생'(2010~2012)이라는 만화가 연재됩니다. 이 만화는 네이버 웹툰에서 처음 '일진'과 '학교폭력'이 등장하는 만화를 연재한 사례입니다. 그 후 '고삼이 집나갔다'(2011~2013), '패션왕'(2011~2013) 등의 만화가 방황하는 청소년을 다루면서 폭발적인 인기를 끕니다. 기존 웹툰에 투영된 학생의 모습은 좋게 말하면 문제가 없었지만 나쁘게 이야기하면 실제 학생들의 모습과 거리가 멀었습니다. 하지만 위 두 만화의 등장인물들은 어찌됐건 당시 학생들의 모습을 그대로 투영했고, 그 결과 큰 공감을 얻습니다. 이 과정에서 방황하는 청소년, 나아가 '일진'이라는 소재가 점점 웹툰에 스며들게 됩니다. 이후 많은 신인작가들이 데뷔를 노리고 당시 인기를 쉽게 끌 수 있는 일진 소재를 무분별하게 만화에 도입합니다. '프리드로우'(2013~), '외모지상주의'(2014~) 등이 대표적인 예가 아닐까 합니다. 이 만화들은 일진이라는 소재를 액션물, 청춘물 등과 잘 결합하여 그동안 공급이 늘 부족했던 '대리만족을 시켜줄 이야기'의 수요를 충족시킵니다.
비슷한 시기, 일본 만화의 영향이 웹툰계에서 한층 강해집니다. 일본만화에 영향을 받은 작가들은 웹툰 시장 극초창기부터 항상 있었지만 특정 독자들 사이에서만 인기를 끌고 화제가 되곤 했습니다. 하지만 2010년 이후 일본만화의 특성을 잘 로컬라이징한 만화가 점점 등장하기 시작합니다. 이 만화들은 특유의 스토리텔링과 상업적인 요소는 그대로 가져오되, 캐릭터와 대사를 한국 정서에는 크게 어긋나지 않도록 잘 설정하여 기존에 일본만화의 영향을 받은 만화에서 느낄 수 있던 거부감을 덜어냈습니다. 신의 탑(2010~), 소녀더와일즈(2011~2016), 다이스(2013~) 등이 그 예입니다.
그리고 제가 지금 언급드린 두 가지 경향성은 2017년 현재까지 이어지고 있는 듯 합니다. 이 유행이 긴 기간 이어지고 있는 데에는 우선 중소 플랫폼의 등장으로 인해 능력있는 신인 작가들이 다른 플랫폼에서 많이 데뷔했기 때문입니다. 새로운 유행을 큰 플랫폼에 들고 들어와서 히트를 시킬 수 있는 작가들이 적어졌거든요. 더불어 2014년 이후 웹 커뮤니티와 SNS의 영향력은 지속적으로 이어지고 있는 각종 내부 갈등으로 인하여 점점 줄어들고 있고 웹 문화 자체가 살짝 정체기에 있는 듯 합니다.
한 때 유행이었던 '병맛'과 '공감'은 더이상 유행은 아니지만 완전히 사장되었다고 보기도 어렵습니다. 대신 웹툰이라는 문화의 일부가 되어 정착이 된 것으로 보입니다. 이 이야기는 이 글에 짧게 곁들여 할 이야기는 아니라서 나중에 기회가 된다면 새 글에서 다시 이야기해드리도록 하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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