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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애니 리뷰] 목소리의 형태

 

스포주의! 

나는 '목소리의 형태'를 보고 온 사람들이 '이 영화는 학교 폭력 가해자가 자위하는 내용일뿐이다!'라며 격분하거나 '아니다, 난 이해할 수 있다. 좋은 영화였다.'라는 호평을 내리는 걸 보고 어쩌다 사람들이 이렇게 상반된 반응을 보이게 된 건지 호기심이 동해 영화를 보러갈 수 밖에 없었다. 그리고 맨날 귀여운 여자애들이랑 상의 탈의한 남자애들이 나오는 애니메이션만 만들었던 교토 애니메이션(이하 쿄애니)가 보여줄 수 있는 한계가 어디까진지 궁금하기도 했다. 사실상 '스즈미야 하루히 시리즈' 이후로 쿄애니가 유명 원작을 다룬 건 처음이라 원작을 쿄애니가 어떻게 소화해낼지 개인적으론 무척이나 기대됐다.

쿄애니가 그동안 내놓았던 TVA 내용을 감안한다면 정말 훌륭한 작품이었다. 내가 영화에서 가장 감동을 받은 지점은 두 남녀주인공이 서로 붙잡고 울 때가 아니라 '교토 애니메이션이 이만큼 해냈어!'라는 느낌을 받았을 때였다. 아니, 정확히는 '일본 서브컬쳐계가 내놓을 수 있는 극한은 이런 것이다!'라는 느낌을 받았을 때였다. 장점이 많은 영화였다. 사실 영화 자체만 봐도 나쁘진 않았다. 그저 학교 폭력을 바라보는 시선이 마음에 안 들었고 거기에 대한 의견이 마음에 들지 않았던 것뿐이지 그것만 제외하면 솔직히 흠을 잡고 싶은 부분은 없다. 아, 하나 더 있기는 하다.

일단 이야기를 시작하려면 그 '하나'에 대해서 먼저 짚고 넘어가야 된다. 이 이야기의 주인공은 남자주인공, 이시다지만 이야기의 구심점은 여자주인공 시노미야다. 영화는 이시다가 학교 폭력 가해자로 지목된 후 그동안 자신이 잘못했음을 깨닫고 시행착오를 거쳐 과오를 고쳐나가는 이야기를 다루지만, 이시다가 성장하는 과정에서 가장 중요한 역할을 하는 건 결국 시노미야다. 이시다가 '시노미야'에게 잘못한 일을 사과하는 과정을 그린 이야기기 때문이다. 따라서 이시다만큼 시노미야에 대해서도 제대로 묘사하는 게 중요하다고 생각한다. 이야기의 주인공이 제대로 서있더라도 구심점이 흔들리면 이야기의 설득력 자체가 무너지기 때문이다.

문제는 시노미야란 캐릭터가 지나치게 단순하게 묘사된다는 거다. 솔직히 시노미야가 자꾸 자책하고 타인을 쉽게 용서하는 상황 자체가 이해가지 않는 건 아니다. 학교 폭력 피해자 중 상당수가 자신의 잘못이 아님에도 자신을 탓하는 걸 너무나도 많이 봐와서 시노미야의 행보가 익숙하면서도 마음 한쪽이 아렸다. 하지만 시노미야는 영화 내에서 자책 그 이상도 그 이하도 보여주지 않는다. 이 영화의 관객은 대부분 비장애인일 거고 학교 폭력의 피해자보단 가해자나 방관자 입장에 서있었을 사람이 더 많을 거다. 그런 사람들이 시노미야의 행동을 하나 하나 속사정까지 이해해가며 짚어나가긴 어렵다고 생각한다. 따라서 영화 내에서 충분한 설명을 해줘야 관객은 시노미야를 이해할 수 있다.

하지만 영화는 이시다의 생각에 너무 집중한 나머지 시노미야가 왜 그렇게 생각하고 행동하는 지는 전혀 드러내지 못한다. 시노미야가 가해자를 보고 느낀 공포를 가해자가 전달해준 노트를 보고 극복했다고 쳐도, 왜 그 후에 하필이면 이시다를 좋아하게 되는지, 왜 자꾸만 미안하다하고 자책하는 지, 이시다를 위한 결단을 속으로 어떤 갈등을 겪으며 내리는 지, 조금도 묘사되지 않는다. 때문에 시노미야는 '완벽한 피해자'가 된다. 모두를 쉽게 용서하고 품고 화도 내지 않는 착한 아이. 사실 시노미야가 완벽한 아이라서 해피엔딩에 도달한 것이 아니라 그동안 살아온 삶의 궤적이 그 아이를 그렇게 만들었을 가능성이 높은데, 거기에 대해선 전혀 설명이 없다. 나는 이 때문에 사람들이 화를 낸다고 생각한다. 피해자는 너무 쉽게 모든 걸 품고 이해하는 듯이 영화 내에서 비쳐줬으니까. 그리고 그게 당연하다는 듯 이야기가 전개되니까 당연히 화가 날 수밖에 없다. 와중에 다른 가해자 조연 캐릭터들은 다들 뚜렷한 개성을 가지고 있고, 어딘가 많이 본 사람들이라 관객들 눈엔 상대적으로 더 입체적으로 비춰지기 때문에 시노미야의 캐릭터는 상대적으로 더 평면적으로 보이게 된다. 짧은 러닝타임을 감안해도 많이 아쉽다.

답답한 와중에 더 스트레스를 주는 건 이 영화가 일어나는 일을 바라보는 시각 때문일 거다. 사실 이 영화에 나오는 사건 하나하나는 전부 있을 법한 일이다. 이 있을 법한 일을 어떻게 바라보느냐가 굉장히 중요하다고 생각한다. 세상 모든 이야기가 전부 정의 구현에 집중한다면 오히려 그게 더 이상하다. 다만 사건을 바라보는 시각이 사려깊었으면 좋겠다는 거다.

'목소리의 형태'의 시각은 적당히 사려깊다. 생각 없이 주어진대로 선악을 가르기보단 하나 하나 짚어가며 해결해보려고 노력하는데 도중에 길을 잃어버린 느낌. 이시다와 시노미야의 관계는 상당히 잘 그렸다는 느낌이 든다. 시작은 처음에는 조금 폭력적이지 않나 싶었지만 결국에 이시다랑 같이 시간을 보내기로 결정한 건 그 누구도 아닌 시노미야 자신이었고, 결국 이시다는 과거를 반성하고 미래를 어떻게 꾸려나가야되는지 깨닫게 되었으며 이 모든 과정을 시노미야가 동의 했으니까. 하지만 그 외 주변인들과 시노미야의 관계는 시노미야가 이시다와의 관계를 지속하기 위해 그냥 참고 받아들였다는 인상을 강하게 받았다. 사실 인간관계를 맺을 때 그런 경우가 굉장히 많아서 그럴 수 있다 치더라도 최소한 그 과정을 날카롭게 바라봐줬으면 했다. 하지만 영화에선 그 과정을 지나치게 감동적으로 그려놓았기 때문에 말하는 사람이 그걸 어떤 생각으로 그려놓았는지는 몰라도 보는 입장에선 '뭐야? 이거 저래야 된다는 거야? 피해자가 품어야 된다고?'라는 의문을 품게 만든다. 결말 자체가 '어쨌든 잘됐으니까 괜찮지 않을까?' 같은 인상을 주는 것도 사실이고. 열심히 고민했는데 놓친 부분이 많았다.

사실 난 쿄애니가 그래도 원작을 사람들이 납득할 만한 수준으로 잘 주물렀다고 생각한다. 원작에서 왕따 주동자는 이시다다. (대신 원작은 이시다가 이후 나락에 떨어질만한 개연성을 좀 더 잘 부여했다고 생각했다. 이 작품에선 그냥 주변인의 배신(?) 때문처럼 묘사되는데, 원작을 자세히 보다보면 정당성은 없더라도 그렇게 될 게 너무 명확하게 보인다. 사실 내가 보다가 너무 힘들어서 원작은 조금만 보고 그만 봤다.) 하는 짓은 똑같기 때문에 시노미야 입장에서 보면 어쨌든 저쨌든 이시다는 나쁜놈이지만 최소한 제 3자 입장에서 보는 관객에게는 그게 상당한 면죄부가 될 수 있을 거라고 본다. 대신 친구들이 더 나쁜놈이 돼서 위의 단점이 좀 더 배가 되는 거고. 아마 제작진은 짧은 시간동안 시노미야와 이시다의 관계에 집중하는 걸 선택했던 거 같고 때문에 위의 단점이 더 폭발적으로 느껴지지 않았나 싶다.

사실 영화가 대놓고 판타지였다면 관객들이 이런 부분에 하나 하나 집중하진 않았을지도 모른다. 하지만 이시다의 생각이나 심리변화, 태도가 지나칠정도로 섬세하고 사실적이어서 관객들은 자꾸 기대하게 되는 거다. 이런 부분까지 짚어냈어, 그럼 다른 부분도 잘 짚었겠네, 같은 느낌? 이시다는 지나치게 현실적인데 주변은 지나칠 정도로 현실적이지 않아 이질감이 든다. 솔직히 이시다 엄마나, 시노미야 가족, 학교의 태도는 정말 이상적일 정도로 완벽하다. 현실에서 가해자 부모들은 저렇게 저자세를 보이지 않고, 피해자 부모 중에서도 가해자와 학교의 대응 대신 자기 자식을 탓하는 사람이 꽤 있다. 그리고 애초에 학교에서 선생님을 따로 붙여줄 정도로 시노미야를 신경썼다면 이 모든 걸 조기에 발견하고 애들을 진압했지 않았을까? 담임 선생님도 꽤나 단호하게 보이던데, 그 정도 성미에 사리분별력이 있으면 진작에 일이 커지기 전에 이미 가해자 부모가 두세번도 더 학교에 불려 갔을 거다. 이 영화에서 아이들간에 갈등이 촉발되고, 피해자가 생기는 과정은 지나치게 사실적으로 묘사되는데, 어른들은 현실과는 꽤나 거리가 멀다. 이런 부분도 자잘하게 관객들을 화나게 하지 않았나 싶다. 기대를 많이 하게 만들지만 기대에 못 미치는 부분이 많았던 느낌. 사실 학교 폭력이라는 게 꽤나 어른들까지 얽힌 복잡한 문제인데 아이들만의 일로 축소하고 집중하다보니 부족하다는 느낌을 받지 않나 싶다.

뭐 열심히 길게 깠지만, 나는 개인적으로는 괜찮았다고 본다. 이런 시도 자체가 의미있었다고 생각한다. 뭐가 부족했고 마음에 안 들었건 '목소리의 형태'는 최선을 다해 이 문제에 대해 치열하게 생각하고 나름의 해답을 내놓으려고 애쓴 영화이고, 난 그 부분이 마음에 들었다. '목소리의 형태'가 도화선이 되어 더 많은 이야기가 나와 더 깊은 생각을 들을 수 있으면 좋겠다. 그리고 이 영화가 다른 부분을 쳐내면서까지 집중하려고 노력했던 이시다와 시노미야의 관계와 이시다의 발전만을 보는 것만으로도 훌륭한 경험이지 않았나 생각한다. 

+) 작화는 쿄애니 TVA 다 때려치고 극장판 길만 걸으소서 외칠 정도로 훌륭했다. 큰 스크린으로 그 섬세한 작화를 잘 감상할 수 있어서 좋았다. 사실 내용도 평소에 쿄애니가 내놓는 TVA보다 훨씬 좋아서 계속 이런 시도를 자주 해줬으면 한다.
++) 이미지를 통한 비유가 굉장히 잘 사용됐다.(문학알못이라 이게 맞는 표현인지는 잘 모르겠음) 그래서 막 사람의 감성을 흔든다. 반복적으로 떨어지고 낙하하는 장면이 나오는데 그게 자꾸 첫 장면을 생각나게 하고 끝에 가서는 그렇게 쌓이고 쌓인 느낌이 폭발하는 듯했다. 그리고 난 그런 걸 좋아해서 이렇게 산더미처럼 욕을 해놓고도 나중에 시간나면 또 볼 거 같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