열여덟. 폭군을 향한 아버지의 간언 때문에 내 목은 가문과 함께 단두대 위에서 잘려나갔다.
그리고 다시 눈뜬 열두 살의 생일. 가문을 살리기 위해 나는 폭군의 간신이 되기로 결심했다.
그러니 폐하, 우리 좀 친해져봐요. 성심성의껏 잘해드릴 테니 또 죽이진 말아주세요!
“저는 진짜 전하 편이라니까요? 완전 맹세!”
“입 닥쳐.”
그런데 인간불신에 빠진 이 폭군 유망주, 점점 만만치가 않아진다.
“전하, 제가 당신을 기만하게 하지 마세요.”
“네가 내 옆에 있을 수 있는 방법이 기만뿐이라면 그리해.”
“네?”
“다시 말하지만, 난 내 건 아껴. 내 허락 없이 네 몸에 상처 내지 마.”
작품 내용 소개는 늘 그렇듯이 서점 홈페이지에서 긁어옴.
초독은 아니고 재독임. 코시국 때 읽고 최근에 다시 읽어봄. 내용은 죄 까먹은 채로.
내가 얼마나 이걸 잊고 살았냐면 처음 읽을 때도 '이거 결말에 좀 문제가 있다지..?'하면서 읽기 시작했는데
다시 읽을 때도 결말에 좀 문제가 있긴 했다는 것과 당시에 좀 재밌게 읽었다는 것 외에는 그 어떤 것도 생각나진 않더라..
2020년에 재밌게 읽긴 했는데 그게 2026년에 유효할지는 몰라 확인 차 한 번 읽어보았다.
6년 시간차가 확 체감이 되더라. 다 읽고 난 소감이 나 이제 이런거 못 읽겠네였음ㅋㅋㅋㅋㅋ
이 소설은 18년~19년에 연재됐는데 독자가 회빙환 마스터임을 전제하고 모든 설명을 과감하게 건너뛰는 요즘 트렌드와 달리 회귀 설정도 꼼꼼하게 설명해주며 시작함.
휴대폰에서 회차별 결제를 하여 읽을 것을 상정하여 쳐낼 건 다 쳐내는 요즘 스타일도 아니라 묘사도 구구절절 들어가있음.
오랜만에 보니까 이런거 반갑더라. 근데 고구마도 약 2.5권정도 먹임ㅋㅋㅋㅋ 으악 목 막혀요ㅠㅠ
이 소설은 대략 2.5권의 고구마와 3권의 사이다, 그리고 0.5권 분량의 외전으로 구성되어있다.
남자주인공인 루페르트가 황태자가 되는 시점이 고구마와 사이다를 나누는 분기점이라고 할 수 있음. 그리고 그 고구마 구간을 지나는게 꽤 힘들었다...
웹소설 뉴비 시절에는 내가 온갖 서브컬쳐 컨텐츠를 섭렵해왔다 하더라도 웹소설만의 클리셰는 잘 몰랐단 말임?
그래서 황자가 상단으로 자금줄을 확보하고 연금술(이라고 하지만 작중 취급이나 실제 돌아가는 거 보면 그냥 흑마술임)도 쓰고...
그런 것들이 꽤 신기해서 초반 구간도 꽤 재미있게 봤음.
미래의 폭군을 회유? 이런 것도 많이 본 적 없었고.
근데 지금은 미래의 폭군을 회유하는 여주 3만명 상단으로 자금줄 확보하는 로판 등장인물 10만명 마법 쓰는 애들 한 5억명 보고 왔거든요?

그래서 고구마 구간이 그렇게 새롭지 않았음.
그럼 남은 것은 아래 세 가지를 어떻게 풀어내는가에 달렸다고 볼 수 있다.
(1) 주인공 라리에트는 어떻게 황자 루페르트를 회유하는가?
(2) 회귀 전 라리에트에게 숨겨진 비밀은 무엇인가?
(3) 황자는 어떻게 태자 자리에 오르는가?
근데 이 세 가지가 영 대충 설명됨.
이하 스포주의
(3)번부터 가겠음. 이 소설의 남자주인공 루페르트는 말버릇이 영 일진짱 인소남주 같지만....
그건 작중에서도 10대로 나오니 그렇다 치고, 어쨌든 얘는 엄청난 먼치킨임.
얼굴 잘생겼지, 연금술도 잘 해서 발명도 잘하지, 상단도 크게 키워서 빽은 없어도 돈도 많고 업무능력도 달리지 않음.
근데 이 부분이 구체적으로 서술되어있지 않음.
얘가 상단을 어떻게 키우는지, 어떻게 권력을 장악하는지가 굉장히 두루뭉실하게 나오거나 짧게 서술됨.
뭐 이 부분은 로판이니 대충 쓰고 넘어갈 수도 있는 부분이기도 함.
근데 (2)번, 라리에트가 본인을 둘러싼 비밀을 밝혀내는 부분도 영 치밀하게 전개되지는 않음.
이건 우리 라리에트쨩이 평범한 친구로 묘사되기 때문에 그러함.
라리에트의 남친은 엄청난 먼치킨이지만 라리에트 본인은 별다른 능력이 없음.
얘가 우당탕탕 구르며 뭔갈 노력하긴 하는데...주위에 휘둘리며 주변이 밝혀줄 때에만 진상을 알아챌 수 있음.
그래서 이 로판에는 잠입도 있고, 액션도 있지만 진상을 밝히는 방식은 오히려 일일드라마에 가까움.
이제 남은 건 (1) 하나임. 라리에트는 어떻게 루페르트를 회유하는가?
외롭고 고통스러운 어린시절을 겪는 왕자님에게 본인의 귀여움을 어필하고 부족한 애정이라도 보여줍니다.
근데 이게 먹힘ㅋㅋㅋㅋ 그리고 먹힐만함ㅋㅋㅋㅋ 공략을 정말 어릴때부터 길게 오래 했고, 이렇게 생긴 아기다람쥐가 예쁜말 하면서 쫓아다니면 함락 안 당하는게 사람임?

내가 1권 내내 '얘 뭐하는 짓이냐...'하다가 1권 끝에 실린 연재 당시 표지 보자마자 '아 납득 우리 아기다람쥐가 저러면 누가 안넘어감?' 이랬잖음.
뭐 설득력과는 별개로 폭군 꿈나무를 햇살력으로 정화하는 것도 유구한 클리셰 아닙니까?
나 그런 거 5년 동안 한 4천개 보고 왔다고.
만약 앞서 말한 세가지 요소 중 하나라도 다르게 서술되었다면 난 재독 때도 이 소설을 재미있게 읽었을 것임.
루페르트가 권력을 먹어가는 과정이 자세하게 묘사되었다면 권력암투물 보는 맛으로 봤을 테고
라리에트가 자기를 둘러싼 비밀을 직접 파헤쳤다면 그것 나름대로 카타르시스가 있어 재밌게 읽었을 것임.
맨날 보는 햇살뿌리기 외에 다른 방법으로 회유를 했다면 음... 이건 나름대로 신선하군 별식이네 했겠죠.
근데 어려운 부분은 뭉개고, 쉬운 부분은 아는 내용이니 2.5권 내내 지루함을 느낄 수밖에 없었음.
근데 고구마 구간은 다른 말로하면 빌드업 구간임.
빌드업을 2.5권 넘게 하니까 나머지 세권이 정말 재밌음.
사이다 구간은 정말 재미있게 봤다ㅋㅋㅋㅋ
자 빌드업 구간 동안 라리에트는 불우한 유년기를 보낸 애정결핍 황자님에게 이것이 관계다~ 이것이 애정이다~ 살짝 맛보기를 시켜주었고
루페르트는 아기다람쥐의 시식코너에 홀딱 넘어가 태자가 될 때 쯤에는 첫사랑에 빠진 소년처럼 굴기 시작함.
빌드업을 길고 상세하게 해놨으니 얘의 행동이 독자들에게 잘 납득이 되는데다가
얘 나이가 진짜 첫사랑을 할 법한 나이라 그게 정말 잘 어울리고 재밌음.
그리고 황자님께서 이제 권력도 쥐셨고 연금술도 하실 줄 아시기에 폭주 스케일 또한 굉장히 큼.
부창부수라고 라리에트도 시기 맞춰 자살 기도, 도주 등 로판의 온갖 자극적인 요소 다 보여줌.
이 소설이 개그 스킨을 씌워두기도 했고 대부분의 범죄행각이 미수로 끝나서 그렇지 자극적이지 않은 건 아님... 다시보니 고자극 로판 맞음.
자극적인 요소를 이렇게 썼는데 재미없으면 그것도 문제다.
그리고 말 많던 결말은 이제 두번째 보니 별 생각 안 들더라.
처음에는 좀 생뚱맞다 싶었는데, 재독때는 워낙 다른 문제가 더 눈에 띄다보니... 뭐 대법관이 어떠냐~ 약간 이 마인드 됨.
라리에트가 그냥 황후가 되면 너무 얘가 양보하는 꼴이 되고,
그렇다고 루페르트에게서 권력을 뺏을 명분도 마땅치 않아 나온 결말이 아니었을까... 사료됩니다.
그리고 제가 이걸 초독하고 짧게 소감 남긴 게 있는데 대충 요약하자면 '다른 거 다 괜찮은데 애 말버릇이 좀 그러네요. 황자님께서 씹이 뭡니까, 씹이!' 대충 이런 내용이었거든요?
근데 이번에는 그런 가벼운 말투가 오히려 독특한 캐릭터를 만들어서 재밌지 않았나하는 생각이 들었음.
30대 전무가 애새끼짓하면 저 인간은 저 나이 먹고 왜 저러나 한숨만 나오지만
애새끼가 애새끼짓 하는 건 어쩔 수 없잖아요?
말투도 같은 맥락에서 뭐... 급식이 급식말투 쓰는 건 어쩔 수 없지 않나 싶었음.
오히려 이번에는 내 나이가 더 걸렸는데, 어린애들 로맨스 보면서 설레는... 이게... 이 상황이 맞나??? 싶었음.
내 친구들은 육아물 안 보고 이제 리얼 육아한다고.
내 취향은 카카페 취향인데... 이제 카카페를 보기엔 나이가 너무 들었다... 싶었던 독서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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